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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리다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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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리다오 사건은 1979년 대만 가오슝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 탄압 사건이다. 국민당의 일당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했고,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주요 야당 인사들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언론 통제와 왜곡 보도가 이루어졌다. 메이리다오 사건은 대만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민주진보당 창당의 기반이 되었다. 이 사건은 대만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으며, 5·18 민주화 운동과 유사한 점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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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리다오 사건
지도 정보
사건 개요
명칭가오슝 사건 (高雄事件)
다른 명칭메이리다오 사건 (美麗島事件), 포모사 사건 (Formosa Incident)
발생일1979년 12월 10일
장소타이완 가오슝
관련 인물
주요 인물스밍더
황신제
쉬신량
린이슝
천쥐
뤼슈롄
야오자원
장쥔슝
린홍쉬안
사건 배경
원인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민주화 요구
주요 요구언론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민주 선거
사건 전개
발단세계 인권의 날 기념 집회
경과경찰과의 충돌
시위대의 격렬한 저항
계엄령 하의 대규모 검거
정부 대응관련자 대규모 체포 및 기소
군사 재판 회부
사건 결과
처벌주동자들에 대한 중형 선고 (반란죄)
관련자들에 대한 징역형 선고
영향타이완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
민주화 요구 확산
민주진보당 창당의 계기
기타 정보
관련 재판가오슝 폭력 사건 반란안 (高雄暴力事件叛亂案)

2. 역사적 배경

1949년 국공 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이동했다(中華民國國府遷臺|중화민국 국부천대중국어). 이후 대만은 국민당의 사실상 일당 통치 하에 놓였으며, 장제스장징궈로 이어지는 권위주의적 통치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대만 사회 내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1979년 당시, 당외는 공식적인 허가 없이도 여러 차례 공공 집회와 시위를 열었다. 국민당 정부는 초기에 시위 진압보다는 진압 장비를 갖춘 경찰을 보내는 정도로 대응했다. 이러한 소극적인 대응은 당외 세력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그들은 더욱 급진적인 방식을 추구하게 되었다.[7]

2. 1. 국민당의 일당 독재와 계엄령

1949년부터 1990년대까지 대만은 중화민국 국민당의 통치하에 사실상 일당제 국가였다. 1970년대 후반,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국민당의 많은 반대 세력들은 당외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5] 1977년 선거에서 당외는 지지 기반을 크게 확대하여 이전보다 더 많은 의석을 얻었다. 이 선거 결과는 집권 국민당에 대한 준 야당으로서 당외의 잠재력을 보여주었고, 이어진 대중 운동의 기반을 마련했다.[4]

1978년 12월 16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미국이 1979년 1월 1일을 기해 중화민국과의 공식 관계를 단절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장징궈 총통은 즉시 선거를 무기한 연기했다. 꾸준히 지지를 확대해 온 당외는 장 총통의 결정에 강한 좌절감과 실망감을 느꼈다.[4][6]

황신제 등 당외 지도자들은 선거 재개를 위해 국민당 정부에 청원했지만 거부당했다. 1979년 1월 21일, 국민당은 또 다른 당외 지도자인 위텅파와 그의 아들을 중국 공산당을 위한 선전을 했다는 의도적인 거짓 혐의로 체포했다.[4] 당외는 위텅파의 체포를 완전한 탄압의 신호로 간주하고 거리에서 급진적인 시위를 벌이는 마지막 노력을 하기로 결정했으며,[4] 이는 보수적인 국민당과 당외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7]

2. 2. 당외 운동의 성장

1970년대 후반, 국민당에 반대하며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세력, 즉 '당외' 인사들이 점차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1975년 캉닝샹이 창간한 잡지 ''타이완 정치 평론''은 민주주의 이념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5] 이 잡지는 1976년 12월 27일 발행된 5호의 기사로 인해 발행 허가가 취소되기도 했다.

1977년 지방 선거에서 당외는 지지 기반을 확대하며 더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4] 이는 국민당에 대한 준 야당으로서의 잠재력을 보여준 결과였으며, 이후 대중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4]

2. 3. 미중 관계 변화와 선거 연기

1978년 12월 16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1979년 1월 1일을 기해 중화민국과의 공식 관계를 단절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6] 이는 1971년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에 유엔 지위를 잃은 이후 대만 정부에게 가장 심각한 도전이었다.[6] 장징궈 총통은 이를 빌미로 즉시 선거를 무기한 연기했다. 꾸준히 지지를 확대해 온 당외는 장 총통의 결정에 강력한 좌절감과 실망감을 느꼈는데, 이는 그들이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방법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4][6]

2. 4. 위덩파 체포와 쉬신량 탄핵

1979년 1월 21일, 국민당은 당외 지도자 위덩파와 그의 아들을 중국 공산당을 위한 선전을 했다는 의도적인 거짓 혐의로 체포했다.[4] 당외는 위덩파의 체포를 완전한 탄압의 신호로 간주하고 거리에서 급진적인 시위를 벌이는 마지막 노력을 하기로 결정했으며,[4] 이는 보수적인 국민당과 당외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7]

위덩파는 체포 후, 스밍더 등의 지원을 받아 당외 활동가 60명으로 구성된 "인권 보호 위원회"를 결성하고, 3월 9일 첫 공판에 야오자원을 변호인으로 출정시켰다. 또한 위원회는 국제 앰네스티와 협력하여 보석 운동을 계속하였다.

4월 20일, 감찰원은 계엄령 기간 동안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집회에 참여한 쉬신량 현장을 탄핵했다.[8] 위원회는 이 탄핵 결의에 관해서도 조직을 동원하여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

2. 5. 메이리다오 잡지 창간과 탄압

1979년 5월, 황신제는 당외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쉬신량을 이사로 하여 ''메이리다오 잡지''를 창간했다.[8] 이 잡지는 창간호부터 25,000부가 매진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9] 두 번째와 세 번째 호는 거의 10만 부, 네 번째 호는 11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다.[9]

그러나 국민당 정부는 1979년 10월 17일, 22개의 보안 기관 회의에서 잡지의 두 번째 호에 실린 "한국 경제 기적의 신화 폭로"라는 기사에 대한 대한민국 대사관의 항의를 이유로 잡지 금지 제안을 채택했다.[9] 이 기사는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이 독재와 인권 탄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국민당 정부는 이를 문제 삼았다.

1979년 11월과 12월 초, 타이완 수비 사령부의 남부 사령부는 타이베이, 가오슝, 핑둥시에서 폭력배들을 사주하여 메이리다오 잡지 사무실과 황신제의 거주지를 습격하는 6건의 사건을 일으켰다.[10] 이 과정에서 한 직원이 도끼에 맞아 부상을 입기도 했다.[10] 이 사건은 중장 장치슈(常持琇中將|창츠슈중국어)의 소행으로 알려졌다.[10]

3. 사건의 경과

1979년 12월 10일, 세계 인권 선언일을 맞아 메이리다오 잡지사는 가오슝에서 대규모 인권 기념 집회를 계획했으나, 국민당 정부는 이를 불허하고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군경을 배치했다.[9]

이에 앞서 11월 30일, 대만인권위원회는 가오슝시 제일분국에 세계 인권의 날인 12월 10일 오후에 초당파 데모를 신청했지만 불허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신청했으나 모두 거부되었다. 결국 운동가들은 가오슝시에서 무허가 데모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12월 9일, 국민당 정부는 군사 훈련을 이유로 12월 10일의 모든 데모 활동을 금지했다. 같은 날, 『메이리다오』 자원봉사자 야오궈젠과 추성슝이 전단 배포 중 체포되어 폭행당하는 사건(구산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더 많은 사람들의 시위 참여를 유발했다.

12월 13일, 정부는 대만 전역에서 국민당 외 운동가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1980년 2월 20일, 황신제, 스밍더, 장쥔훙, 야오자원, 린이슝, 천쥐, 뤼슈롄, 린훙쉔 등 8명이 반란죄로 군사 법정에 기소되었고, 30여 명은 일반 법정에서 기소되었다.[16] 장더밍, 천지청 등의 지원으로 15명의 변호인단이 결성되었으나, 군법 회의에서 기소된 8명 전원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스밍더는 무기 징역, 황신제는 징역 14년, 나머지 6명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16]

3. 1. 구산 사건 (12월 9일)

1979년 12월 9일, 《메이리다오 잡지》 가오슝 지부에서 "인권 포럼"을 홍보하고자 선전 차량 두 대를 보냈다. 그러나 이 차량들은 경찰에 의해 제지되었고, 자원봉사자 두 명이 체포되어 구타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다음 날 포럼에 참석할 계획이 없던 당외 세력과 지지자들이 구산 공안국 지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은 많은 당외 세력 구성원들과 지지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어 다음 날 포럼에 참석하는 계기가 되었다.[4][11]

3. 2. 12월 10일 집회와 충돌

1979년 12월 10일, 세계 인권 선언일을 기념하여 메이리다오 잡지사 가오슝 서비스 센터는 로터리 공원에서 집회를 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당국은 집회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이에 시위대는 중앙 공원에서 집회를 강행하기로 결정했다.[9]

이에 앞서 12월 9일, '포모사 잡지' 가오슝 지부의 선전 차량이 경찰에 의해 제지당하고 자원봉사자들이 체포,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당외 세력과 지지자들의 분노를 일으켜 구산 공안국 지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게 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다음 날 포럼에 참석하게 만들었다.[4][11]

집회 당일, 시위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군사 경찰, 군대,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다. 저녁에 군사 경찰은 시위대를 포위했다가 원래 위치로 후퇴하는 행동을 반복하며 군중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유발하려 했다.[1]

국민당 정부는 군사 훈련을 이유로 12월 10일 모든 데모 활동을 금지했으나,[16] 시위대는 예정대로 집회를 시작했다. 집회 장소는 경찰에 의해 봉쇄되었기 때문에, 시위대는 신싱 분국 앞 로터리로 장소를 변경했다. 황신제의 연설이 시작되자 치안 부대가 시위대를 완전히 포위했고, 스밍더와 야오자원은 경찰 측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오후 8시 30분, 치안 부대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발사하면서 현장은 혼란에 빠졌고, 양측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경찰 응원 부대까지 도착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16]

4. 체포와 재판

중화민국 당국은 메이리다오 사건을 빌미로 사실상 모든 주요 야당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체포된 사람들은 약 두 달 동안 외부와 연락이 두절된 채 구금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감옥에서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후 이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재판을 받았다.

4. 1. 주요 인사 체포 및 투옥

황신제, 스밍더, 린이슝, 뤼슈롄 등 '가오슝 8인'으로 불리는 주요 인사들은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12년에서 무기징역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받았다.[1] 이들은 약 두 달 동안 외부와 연락이 두절된 채 구금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감옥에서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는 보고가 있었다.

피고변호사판결 결과
황신제정칭롱, 천수이볜유기징역 14년
스밍더정셩주무기징역
린이슝장펑지안, 정정슝유기징역 12년
뤼슈롄루촨셩, 정관리유기징역 12년
장준홍궈지런, 요우칭유기징역 12년
천주가오루이정, 장훠위안유기징역 12년
야오자원세창팅, 수전창유기징역 12년
린홍쉬안장준슝, 리셩슝유기징역 12년



이 외에도 '가오슝 33인'으로 불리는 집회 참여자 33명이 민사 법원에서 2년에서 6년 형을 선고받았고, 스밍더를 숨겨준 혐의로 장로교 관련 인사 10명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 중 장로교 사무총장 가오춘밍은 7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1] 스밍더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그의 아내이자 미국 시민권자인 린다 아리고는 추방되었다.

당외 참여자였던 황신지에, 야오자원, 장춘훙, 린훙쉬안 등도 내란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12]

4. 2. 린이슝 가족 피살 사건

1980년 2월, 민주화 운동 지도자였던 린이슝은 구금되어 중국 국민당 경찰에게 심한 폭행을 당했다. 그의 아내 팡수민은 감옥에서 그를 만나 국제 앰네스티 오사카 지부에 연락했다. 다음 날, 린이슝의 어머니와 일곱 살 된 쌍둥이 딸들이 그의 집에서 칼에 찔려 사망했고, 그의 맏딸은 크게 다쳤다. 당국은 린이슝의 집이 24시간 경찰 감시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4. 3. 언론 보도 통제와 왜곡

당시 주류 언론은 국민당 정부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메이리다오 사건을 왜곡, 축소 보도했다. 중국시보, 연합보, 국민당 소유의 중앙일보는 시위대를 폭력 집단으로 묘사하고, 친북, 친공 세력으로 몰아갔다.[13] 이러한 뉴스 보도는 부정적인 여론을 야기했고, 이는 언론이 당외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추가 증거로 사용되었다.[6]

이 사건은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켜 국민당 정부가 피고인에 대한 공개 재판을 열도록 압력을 가했다.[11] 미국의 압력과 뉴욕 타임스 등의 국제 언론 보도에도 불구하고,[14] 대만의 주류 언론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국제 언론의 보도가 편향된 루머라고 주장했다.[15]

5. 메이리다오 사건의 영향과 의의

메이리다오 사건은 대만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대만 시민들의 정치 의식이 고양되었고, 중국 국민당의 일당 독재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었다.[1] 1987년에는 계엄령이 해제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시위를 넘어, 공개 재판과 체포로 이어지면서 친민주주의 단체와 반(反) 국민당 정치 세력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1] 특히, 대만인뿐만 아니라 해외의 대만 커뮤니티까지 정치적 행동에 참여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1]

메이리다오 사건은 대만 전역에 정치적 각성을 불러일으켰으며, 정치에 무관심했던 대만인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16] 국민당은 과거와 같은 탄압 방식으로는 민주화를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16]

하지만, 메이리다오 사건은 민주진보당 내부의 주도권 다툼에 이용되기도 했다. 2004년 총통 선거 당시 부총통 후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뤼슈롄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자신과 노선 대립이 있었던 29명을 "반뤼" 입법위원으로 비판하는 등, 현대 대만 정치에서 여전히 논쟁적인 문제로 남아있다.

5. 1. 민주진보당 창당의 기반

메이리다오 사건은 대만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은 공개 재판과 체포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시위를 촉발했고, 친민주주의 단체와 중국 국민당(KMT) 반대 세력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1]

이 사건 이후, 국민당과 다른 정당들 사이의 10년간의 정치적 투쟁이 계속되었다.[1] 이 사건의 중요성은 대만인뿐만 아니라 해외 대만 커뮤니티도 정치적 행동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에서 비롯된 운동은 현재 집권당인 민주진보당의 기반을 형성했다.[1]

메이리다오 사건 관련자들은 이후 대만 민주화 운동의 핵심 세력이 되었고, 1986년 민주진보당(민진당) 창당을 주도했다. 이들은 민주 개혁과 국민당 독재 체제 타파에 큰 공헌을 했다.

메이리다오 사건은 민진당의 정치적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민진당 결성 이전의 사건이지만, 이후 당원 중 다수가 사건과 관련되어 민주 개혁과 국민당의 일당 독재 체제 타파에 큰 공적을 남겼다.[17] 변호사이자 유죄 판결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인 야오자원은 "법정에 해외 인권 단체도 방청하러 온 앞에서 오랫동안 계엄령 해제 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전에는 하루 만에 나왔던 판결이 일주일 이상 걸렸고, 반란죄로 징역 12년은 가장 가벼운 형벌이었다", "사형에 처할 수 없었던 국민당에게는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16]

천수이볜은 변호인 중 한 명이었고, 그의 러닝메이트였던 뤼슈롄은 '가오슝 8인' 중 한 명으로 12년형을 선고받고 5년 반을 복역했다. 군사 재판에서 심리받은 8명 중 뤼슈롄은 부총통에, 야오자원은 고사원장에, 린이슝은 민주진보당 주석, 張俊宏|장쥔훙중국어은 입법위원, 천쥐는 노동위원회 주임위원(현재는 감찰원 원장)을 맡아 민주진보당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다. 변호인단에서는 장펑젠은 초대 민진당 주석에, 황신제의 변호를 맡았던 천수이볜은 총통에, 셰창팅은 민진당 주석, 가오슝 시장, 행정원장을 역임했고, 쑤전창은 타이베이현장, 총통부 비서장, 민진당 주석, 행정원장을 역임했으며, 장쥔슝은 행정원장 및 민진당 비서장을 역임했다.

5. 2. 대만 민주화의 상징

메이리다오 사건은 대만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선 시민들의 용기와 희생을 보여주는 동시에, 민주주의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1]

이 사건은 중국 국민당(KMT) 집권 체제하에서 정치적 반대에 대한 일부 지원이 이루어지고, 본토인의 권위에 대한 대만 시민들의 불만이 커져가던 시기에 발생했다. 공개 재판과 체포로 이어진 일련의 정치적 시위는 친 민주주의 단체/반 KMT 정치 반대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1]

가오슝 사건 이후, 본토인이 통제하는 KMT와 다른 정당들 사이에서 10년간의 정치적 투쟁이 계속되었다. 이 사건은 대만의 대만인뿐만 아니라 해외 대만 커뮤니티도 정치적 행동에 참여하게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1] 이 사건에서 비롯된 운동은 현재 집권당인 민주진보당의 기반을 형성했다.[1] 당시 정치적 반대는 아직 대만 독립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자결을 요구했다. 북아메리카유럽에 대만 단체의 해외 지원 네트워크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일반 대중의 정치 의식을 높였고, 당외에서의 정치 운동 재개를 가능하게 했다.[17] 변호사이자 유죄 판결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인 야오자원은 "법정에 해외 인권 단체도 방청하러 온 앞에서 오랫동안 계엄령 해제 등을 주장할 수 있었다"라고 회고했다.[16] 대만대 저우완야오 교수는 메이리다오 사건의 의의를 "대만 전역에 정치적 각성을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평가한다.[16]

이후 관련된 많은 인물들이 대만 정치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천수이볜은 중화민국 총통으로 두 번 당선되었고, 그의 러닝메이트였던 뤼슈롄은 "가오슝 8인" 중 한 명으로 5년 반을 복역했다. 군사 재판에서 심리받은 8명 중 뤼슈롄은 부총통에, 야오자원은 고사원장에, 린이슝은 민주진보당 주석, 張俊宏|장쥔훙중국어은 입법위원, 천쥐는 노동위원회 주임위원 (현재는 감찰원 원장)을 맡아 민주진보당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다. 변호인단에서는 장펑젠은 초대 민진당 주석에, 황신제의 변호를 맡았던 천수이볜은 총통에, 셰창팅은 민진당 주석, 가오슝 시장, 행정원장을 역임했고, 쑤전창은 타이베이현장, 총통부 비서장, 민진당 주석, 행정원장을 역임했으며, 장쥔슝은 행정원장 및 민진당 비서장을 역임했다.

메이리다오 사건은 민진당의 정치적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민진당 결성 이전의 사건이지만, 이후 당원 중 다수가 사건과 관련되어 민주 개혁과 국민당의 일당 독재 체제 타파에 큰 공적을 남겼다.

5. 3. 한국 민주화 운동과의 비교

메이리다오 사건은 한국의 5.18 민주화운동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두 사건 모두 권위주의 정권의 폭력적인 탄압에 맞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봉기한 사건이다.[16]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민주주의가 결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시민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희생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가치임을 보여준다.

5. 4. 관련 인물들의 이후 행보

메이리다오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인사들은 석방 후에도 대만 정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8명 중 뤼슈롄은 부총통을 역임했고,[17] 야오자원은 고사원장을 지냈으며,[17] 린이슝은 민주진보당 주석을 역임했다.[17] 張俊宏중국어은 입법위원을, 천쥐는 노동위원회 주임위원과 감찰원 원장을 역임하며 민주진보당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다.[17]

변호인단이었던 천수이볜은 총통에 당선되었고,[17] 셰창팅민주진보당 주석, 가오슝시장, 행정원장을 역임했다.[17] 쑤전창은 타이베이현장, 총통부 비서장, 민진당 주석, 행정원장을 역임했으며, 장쥔슝은 행정원장 및 민진당 비서장을 역임했다.[17]

한편, 스밍더와 쉬신량은 민진당 주석을 역임했으나 당과 거리를 두고 민진당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린이슝 또한 민진당 주석을 역임했지만, 퇴임 후 핵4 문제로 당 집행부와 대립하여 2006년 탈당했다.[17]

참조

[1] 서적 Literary Culture in Taiwan: Martial Law to Market Law Columbia Univ. Press 2004
[2] 서적 Taiwan: Nation-State or Province? Westview
[3] 뉴스 DPP releases book commemorating the Kaohsiung Incident http://www.taipeitim[...] Central News Agency 200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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